커피는 농산물이다: 같은 원두도 해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단순한 음료로 생각하지만, 사실 커피는 엄연한 농산물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원두는 수확된 커피 체리에서 씨앗을 꺼내고, 가공하고, 건조하고, 볶아서 만들어지죠. 이 모든 과정은 매년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를 매년 같은 브랜드에서 사 마셨는데도 어떤 해에는 상큼하고 과일 향이 강했고, 어떤 해에는 조금 더 단맛이 돌거나, 꽃향이 연하게 느껴졌던 적 없으신가요? 이는 같은 산지, 같은 품종, 심지어 같은 농장이라고 해도 해마다 기후, 강수량, 일조량, 토양 수분, 수확 시기의 차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와인에서 '빈티지'라는 개념이 있듯이, 커피에도 해마다 달라지는 '풍년' 혹은 '약한 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커피를 잘 마시는 사람들은 같은 원두라도 수확 연도(하베스트)를 꼼꼼히 확인하고, 이 해의 맛은 어떤지 비교하는 취향을 갖기도 합니다. 단순히 “예가체프 좋아요”를 넘어서 “2023년 예가체프는 산미가 더 맑고 귤향이 났다”는 식으로요. 이처럼 커피는 같은 이름이라도 해마다 조금씩 다른 성격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싱글 오리진 커피를 즐기는 매력이기도 합니다.
로트 번호(Lot No.)는 왜 중요할까? 작은 차이가 커피 맛을 바꾼다
커피 포장지에서 ‘Lot No.’ 또는 ‘로트 번호’를 본 적 있으신가요? 이것은 단순한 생산 일련번호가 아닙니다. 로트 번호는 말 그대로 ‘수확된 구역’ 또는 ‘작업 배치 단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정밀하게 나뉜 구분입니다. 같은 농장, 같은 품종이라도 해발고도 1500m 구역과 1700m 구역에서 자란 커피는 맛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거든요. 또, 수확일이 이틀만 달라도 숙성 상태나 과육의 수분 함량이 달라질 수 있고, 심지어 같은 날 수확했더라도 워시드, 내추럴, 허니 등 가공 방식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로 갈립니다. 로트 번호는 이처럼 미세하게 구분된 커피의 출처를 나타냅니다. 고급 로스터리에서는 특정 로트를 ‘하우스 블렌드’에 섞지 않고, 그 자체로의 개성을 강조하여 단일 품목으로 판매하곤 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로트 번호를 통해 내가 마신 원두의 정체성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죠. 또한, 이 정보는 단순히 “맛이 다르다”는 경험을 넘어서 “왜 다른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 로트가 훨씬 클린 하네” 같은 대화가 오가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로트 번호는 커피를 한 차원 깊게 이해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같은 농장, 다른 로트: 싱글 오리진의 진짜 정체를 이해하자
‘싱글 오리진’이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이 ‘한 나라에서 온 커피’ 정도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커피 업계에서 싱글 오리진은 훨씬 더 정밀한 개념입니다. 진짜 의미에서의 싱글 오리진은 같은 농장의 한 구역, 한 수확일, 동일 가공 방식까지 모두 일치한 경우를 의미하죠. 즉, 브라질 세라도 지역의 A 농장에서 나온 ‘5월 17일 수확, 워시드 가공, 1600m 고도’ 원두라면 이게 진정한 싱글 오리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커피 브랜드들이 이 개념을 아주 넓게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만 적어놓고 실제로는 서로 다른 농장, 고도, 수확 시기의 원두를 섞는 경우도 많죠. 이런 경우 맛이 일정하지 않고, 품질 관리에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신뢰도 높은 로스터리에서는 구체적인 로트 정보와 수확 연도를 명시하고, 가능한 한 그 단일성(single origin)을 유지하려 합니다. 진짜 싱글 오리진을 고를 때는 포장지에 써 있는 산지 이름만 보지 말고, 수확 연도, 로트 번호, 고도, 품종, 가공 방식 등을 함께 확인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정보는 단지 디테일이 아니라, 내가 마시는 커피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가장 핵심적인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맛의 차이를 이해하고 기록하는 것이 진짜 커피 취향을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산 원두는 왜 지난번이랑 다르지?”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단순히 로스팅 차이나 기분 탓이라고 넘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커피는 농산물이기 때문에 수확 연도, 로트, 가공 방식, 고도, 심지어 저장 기간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생깁니다. 중요한 건 이 차이를 무시하지 않고, 기록하고 비교하는 습관입니다. 예를 들어 2022년 수확의 콜롬비아 수프리모와 2023년 수확의 동일 원두를 비교해 마셔보면, 같은 로스팅임에도 불구하고 향의 복합성이나 산미의 밝기, 바디감에서 다른 점이 분명히 느껴집니다. 이 경험을 기억하고 적어두면 다음 원두 선택이 훨씬 뚜렷해집니다. 실제로 고급 커피 애호가나 바리스타들은 매번 새로운 원두를 마실 때마다 커핑 노트를 남깁니다. 향, 맛, 여운, 산미, 바디감 등을 간단히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깊이 있는 커피 취향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커피도 연습이고, 기억이며, 취향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마시는 커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맛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일. 그것이 커피를 ‘즐긴다’는 것의 본질일지도 모릅니다.